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문단 편집) == 유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유치 엠블럼.svg|width=90%]]}}} || || {{{#ffffff '''1986년 제25회 하계 올림픽 유치전 당시 엠블럼'''}}} || ||<-8> 1992년 올림픽 유치 투표 과정 || || 국가 || 도시 || 1차투표 || 2차투표 || 3차투표 || 결과 || || '''[[스페인]]''' || '''[[바르셀로나]]''' || '''29''' || '''37''' || '''47''' || '''유치 선정''' || || [[프랑스]] || [[파리(프랑스)|파리]] || 19 || 20 || 23 || 유치 탈락 || || [[호주]] || [[브리즈번]] || 11 || 9 || 10 || 유치 탈락 || ||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 || [[베오그라드]] || 13 || 11 || 5 || 유치 탈락 || || [[영국]] || [[버밍엄]] || 8 || 8 || || 유치 탈락 || ||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 5 || || || 유치 탈락 || 유치 운동이 벌어지던 시점에는 그래도 세계 경제가 그럭저럭 회복한 상황이기도 했기 때문에 [[1988 서울 올림픽]] 당시보다는 유치전에 뛰어든 나라가 많았다. 사실 이 시점에서는 이 대회가 냉전의 종식 이후 벌어지는 최초의 대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유치는 비교적 손쉽게 바르셀로나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고향이 바르셀로나다. 그렇다고 사마란치가 노골적으로 바르셀로나를 편들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프랑코 독재 이후 달라진 스페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스페인 정부의 절실함이 겹치면서 바르셀로나는 비교적 손쉽게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이때 미국도 절실히 올림픽 유치를 원했다. 왜냐하면 1992년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년 기념해라서 절실했지만, 스페인은 더욱 절실했고, 결국 유치에 성공했다.[* 게다가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달이 당시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통한 것이었고, 이후 스페인 강대국화의 시작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점에서도 더더욱 스페인의 올림픽 유치 명분을 키우는 셈이 되었다.] 게다가 이미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때문에 후보에 넣었어도 대륙별 순환개최 때문에 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미국은 근대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는 1996년 [[1996 애틀랜타 올림픽|차기 대회]] 개최권을 따냈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는 1996년 대회를 올림픽의 발상지 [[아테네]]가 유치해야 했다는 여론이 강했고 미국이 개최권을 가져간 것에 대한 비판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불과 6년 뒤 미국이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하면서 비판 여론이 더욱 거세졌다.][* 그렇다고 미국이 1996 애틀랜타 올림픽과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잘 치렀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올림픽공원 폭탄테러 사건이 있었고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판정시비가 끊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